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은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문화유산에 대한 포스팅입니다. 오늘의 주제는 바로 훈민정음 해례본입니다.
훈민정음 = 한글 = 백성을 위한 바른소리
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가끔 초등학생들이 훈민정음이 뭐냐고 묻는 질문에 선생님들이 세종대왕이 어쩌고 설명을 한다는데, 그냥 한글이야 라고 설명해주면 됩니다.
훈민정음 해례본이란 훈민정음이라는 문자 체계를 사용하는 방법을 알리기 위하여, 즉 널리 교육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책입니다. 국보 70호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한글을 만들게 된 원리, 그 유래가 나와있는 책이 바로 훈민정음 해례본입니다.
이 책은 1940년에 와서야 발견이 되었습니다.
이전에 훈민정음 언해본이라는 책이 있었는데, 이 책에는 한글의 창제에 대한 부분은 언급이 안되어 있었기 때문에 사실상 1940년 해례본이 발견되기 전에는 그저 썰만 난무했었습니다.
조선시대 해례본은 인쇄부가 많지도 않았던 책이라서 엄청 희귀했던 책입니다.
한때 우리는 한글이 만들어진 것이 세종대왕이 변소에서 문살을 보다가 깨달음을 얻어 한글을 만들었다는 썰을 믿고 그것이 사실인줄 알았었는데, 사실 그런 이야기들이 바로 해례본이 발견되기 전에 일부 학자들이 만들어낸 썰들입니다.
그저 추측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다행히도 해례본이 발견되어 이런 썰들이 그냥 썰일 뿐이고, 한글은 독립적인 방법으로 당시 최고 수준의 언어학과 음성학을 기반을 하여 만들어진 과학적인 언어라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그러나 책의 내용이 워낙 어렵다 보니 아직 학자들 사이에서는 그 해석에 대하여 서로의 의견이 분분합니다.
현재 판본으로 알려지 것은 안동본과 상주본 뿐입니다. 그나마 소재가 알려진 것은 안동본 뿐입니다. 상주본에 대한 이야기는 아래에서 자세하게 하겠습니다. 더불어서 상주본의 가치까지 함께 설명합니다.
2014년에 3의 판본 일부분이 궁중에서 사용하던 모자속에서 발견된 적이 있습니다.
2008년 상주에 사는 배익기 씨는 자신이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을 보유하고 있다고 제보합니다.
고서 수집가였던 그는 집수리를 위하여 짐 정리를 하다가 발견하였다고 했음, 이를 MBC에 제보한 것입니다.
상주본이라고 이름을 붙인 이유는 발견된 장소가 바로 상주이기 때문입니다. (너무 어이없는 작명법인가요?)
기존에 유일하였던 안동본 (안동에서 발견)에 비하여 보존상태가 좋아서 그 가치가 더 높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어느날 상주의 헌책방 주인인 조씨가 배익기씨를 고소합니다. 상주본이 있던 원래 장소는 바로 자신의 책방이었고, 배익기씨가 훔쳐갔다는 것입니다. 법원은 조씨의 손을 들어주었고 결국 조씨가 상주본을 문화재청에 기증하는 것으로 얘기가 되어 모든 것이 마무리 되는 듯 했습니다.
그러나 절도죄라고 하면서도 대법원으로 넘어간 이 사건은 결국 증거가 충분하지 않다고 하여 무죄 판결이 났고, 결국 아직도 상주본을 가지고 있던 배익기씨는 상주본을 문화채정에 줄 수 없다고 반박합니다.
결국 세번째 판결까지 가게된 상황에서 배익기씨가 상주본을 자신만이 아는 장소에 감춥니다.
그리고 그는 문화재청에 1000억의 보상금을 요구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 1000억 사건입니다.
배익기씨가 1000억을 얘기한 것은 대체 어떤 계산법이었을까요?
그 답은 바로 검찰의 조사중간 나온 훈민정음 해례본 가치에 대한 부분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검찰은 해당 고서의 가치가 1조원이라고 평가하였고 배익기씨는 그 10%인 1000억을 요구한 것입니다.
1조원이 나온 배경은 이와 비슷하게 대접받는 문화재인 직지심체요절이 있는데, 이 것의 가치가 8694억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대략 1조를 말한 것이고 그것이 1000억의 보상금을 요구하는 것까지 간 것입니다.
그리고 2015년 배익기씨의 집에 화재가 발생한 적이 있는데, 그 후로도 아직 훈민정음 해례본이 멀쩡하게 보존되고 있는지 아닌지는 아무도 모르는 상황입니다. 경찰 조사에서도 해당 내용에 대해서는 입을 함구하여 아직 상주본이 존재하는지에 대한 여부는 대한민국에서 본인 한 사람만 아는 비밀이 되었습니다.
간송 전형필이란 분은? (이런 위대한 분을 이제까지 왜 몰랐을까)
휘문고등보통학교를 거쳐 일본 와세다대학 법학과를 졸업했다.
일제강점기 때 문화재가 일본으로 반출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고서화와 골동품 등을 수집했다.
1934년 성북동에 북단장(北壇莊)을 개설하여 본격적으로 골동품과 문화재를 수집하는 한편, 1938년 한국 최초의 사립박물관인 보화각(葆華閣)을 북단장 내에 개설하여 서화뿐만 아니라 석탑·석불·불도 등의 문화재를 수집·보존하는 데 힘썼다.
그의 소장품은 대부분 국보 및 보물급의 문화재로 김정희·신윤복·김홍도·장승업 등의 회화 작품과 서예 및 자기류·불상·석불·서적에 이르기까지 한국미술사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1940년대에는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인수하여 육영사업에 힘썼고, 8·15해방 후 문화재보존위원으로 고적 보존에 주력했다.
1960년 고고미술동인회를 결성하고 동인지 〈고고미술 考古美術〉 발간에 참여했다. 1962년 대한민국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1966년 보화각은 간송미술관으로 개칭되었다.
다시 한번 간송 전형필 선생님의 얼굴을 기억하고 그분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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